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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후의 감

<숨>, 죽음이 다시 삶이 될 수 있는 원리에 관하여

by ABCD 2021.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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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생명의 원천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인 해부학자는 기억의 저장 방식을 탐구하기 위한 실험을 하다가(본인 머리통을 스스로 가른 미친놈이다) 뜻밖에도 이 가상 세계가 필연적으로 맞이할 종말을 보게 된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열린 우물이 아니라 봉인된 방'의 구조를 가진 이 가상 세계 내에서는 사람이 움직일 때, 아니 움직이지 않고 생각하기만 해도(따라서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대기압을 높이게 되고 이에 따라 뇌의 작동이 느려지게 된다. 즉, 생명의 실제 원천은 공기가 아니라 기압 차이에 있으므로, 언젠가 대기에 축적된 기압과 지하 저장고의 기압이 동일해지는 날, 이 세계는 숨을 멎게 된다.

Chuck Johnson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세상에 이런 딜레마가 다 있나. 죽음을 향한 질주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방법은 우리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일 뿐이나, 움직이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건 그 자체로 죽음의 또 다른 모습이지 않나.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가상 세계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인간에게는 당연한 명제이지만 '죽음이 흔한 것이 아닌(p. 64)' 이 가상 세계에서는 무게가 전혀 다른 말이다). 하지만 해부학자는 이를 다른 관점에서 받아들인다. 이 가상세계와 이웃한 다른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크롬벽을 뚫어 이 세계를 이웃 세계의 지하저장고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즉 '이 가상 세계를 허파삼아 자기들의 문명을 가동시키는 모습'을 상상한다. 더 나아가, 그 두 세계를 넘어 이 가상 세계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탐사하며 그 문명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가상 세계의 사람들은 이웃 세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있게 된다. 따라서, <숨>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관한 이야기다.

 

<숨>은 가상 세계의 밀폐된 구조(크롬벽) 내에서 수명의 길이가 예견되어있는 삶(심지어 언제 죽을지 수학적, 물리적으로 계산이 가능한 삶)에 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그 구조적 한계를 뚫고 다른 세계가 살아가는 동력이 되어줌으로써 영생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해부학자의 자학적 실험의 직접적 계기가 무엇이었던가. "사람은 어떻게 기억하는가?"이다. 해부학자는 사람의 기억이 공기 흐름 자체에 각인되어 저장됨을 관찰하였다. <숨>은 우리 눈 앞에 해부학자의 머릿 속을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기억의 생물학을 알려줌과 동시에, 해부학자가 사는 세계가 숨을 거둔 이후에도 다른 이가 호흡하는 공기가 되어 영원히 기억되기를 염원함으로써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다방면으로 제시한다.

 

'우리의 모든 공기가 동일한 원천에서 온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동지애'는 이 가상 세계의 사람들 사이 뿐만 아니라, 이웃한 세계와의 사이에서도 유효하게 공유된다. 이야기의 초반에 사람들이 공기충전소에서 단순히 허파를 교환하는 일 뿐만 아니라 사소한 잡담, 가십, 뉴스거리 따위의 소식을 경계없이 나누는 장으로서 역할한다고 소개한다. 따라서, <숨>에서 말하는 '공기'는 물리적 차원에서 생명 유지의 자원일 뿐만 아니라, 소통과 문명의 교류를 널리 의미한다.

 

테드 창은 전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나중에 Arrival -컨택트- 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엄청 재밌게 봤다)에서도 언어와 타문화와의 교류(타문화 정도가 아니라 외계생명체와의 교류다!)에 대해 다루었다. 나도 워낙 외국어와 의사소통에 관심이 많은지라 <당신 인생의 이야기>, <숨>에서 작가가 건네는 메세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내 인생 영화로 <라이온킹>을 꼽고 있는데 <숨>을 읽으며 어쩐지 'The Circle of Life'와 같은 이미지가 그려져서일까, 이 이야기는 꼭 디스토피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가 아닐까.

 

(사실은 단단한 크롬벽을 뚫는 것만큼이나 의사소통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는 디스토피아를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그럼 저 크롬벽은 구글크롬방화벽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지 않냐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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